안녕하세요 이것저것 써보고 있는 자아 D입니다.
최근 MBC 사극 '연인'에 광해군을 언급하지 않아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럼 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인조 시대 때 광해군을 언급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병자호란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28일 ~ 1637년 2월 24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청나라의 숭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의 백성이 청나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습니다.
인조와 광해군
광해군은 조카인 인조로부터 쿠데타(인조반정)를 당한 지 열흘 뒤인 인조 1년 3월 23일(1623년 4월 22일) 강화도로 유배됐습니다. 그 직후 광해군은 참담한 일들을 겪었습니다.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폐세자인 아들이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들렸고 폐세자빈 박 씨는 나무 위에서 망을 보다가 남편이 체포돼 되돌아오는 장면을 목격하고 나무에서 떨어졌습니다. 폐세자 부부는 그 뒤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강화도로 끌려온 데 이어 아들 부부마저 그렇게 되자, 광해군의 부인인 폐비 류 씨는 가슴에 화병이 생겨 162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광해군은 여기저기 끌려다녔습니다. 강화도 서쪽 교동도와 충청도 태안에서도 유배 생활을 했고 제주도로 간 것은 병자호란이 끝난 해인 1637년입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제23권에 따르면, 그가 제주도로 이송되는 과정은 한 편의 첩보 영화 같았다고 합니다. 4면을 휘장으로 가린 선박에 실려 비밀리에 이송됐습니다.
광해군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고 배가 제주도에 닿은 뒤에야 그곳이 제주도임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자신이 제주도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며 슬퍼했다고 <연려실기술>에 쓰여있습니다.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광해군을 복위시키려는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인조에게 발각되 무산되었습니다. 때문에 인조 정권은 광해군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조 정권의 경계심은 광해군의 유배지가 변경된 시점들로도 반영됩니다. 위 <연려실기술>은 유배지가 강화도에서 태안으로 변경된 것은 1624년 이괄의 난 때문이고, 교동도에서 제주도로 변경된 것은 1637년 병자호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세간에는 인조의 리더십이 흔들리 때마다 마다 광해군의 유배지를 더 멀리 내렸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광해군이 여론의 지지를 업고 복권될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글을 마치며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고 그때 큰 비가 내려 제주 사람들은 그 비를 '광해우'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임금과 폐주가 18년 동안 같은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 18년 동안 정묘호란도 있고 병자 호란도 있었습니다. 인조는 광해군을 18년동안 계속해서 신경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사극이라면 광해군을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전도의 굴욕이라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굴욕을 선사한 리더 인조와 광해군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