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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영화의 배경 1212 사태에 대해서

자아D 2023. 11. 27. 13:31

안녕하세요 이것저것 써보고 있는 자아 D입니다.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흥행을 하면서 영화의 배경인 1212 군사 쿠데타가 다시 한번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사조직을 만들 수 없음에도 전두환을 필두로 하나회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박정희가 죽자 이 하나회라는 군대 내 사조직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1212군사반란-가담자들-하나회
1212군사반란 가담자들 하나회 <나무위키>

1212 군사 반란

1979년 10·26 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사망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서울의 봄에서 황정민)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서울의 봄 영화에서 이성민) 간에는 사건 수사와 군 인사 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습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서울의 봄에서 차건우)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 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문민정부 시기까진 주로 12.12 사태 내지 12.12 사건으로 불렸으나 김영삼의 역사바로 세우기 사업을 거치며 반정부 군사 쿠데타(내란)로 재정의되어 공식적으로 12.12 군사반란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1212 군사 반란 원인

1979년 10.26 사건 이후 새벽 4시 김재규가 체포된 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과 박정희 시해로 인한 계엄의 선포로 인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통령 권한대행과 함께 정국을 이끌게 됩니다.

그러나 최규하는 이때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되는데 권한 대행 수락 당시 "지금 이 순간부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겠다."라고 전국 계엄이 아닌 부분 계엄을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이 조치는 사실상 최규하 스스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군 통제권을 포기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유는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지면 총책임은 대통령이 맡게 되지만 일부에 한해 계엄령이 내려지면 국방부 장관이 총책임을 맡게 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최규하는 정치에 휘말리기를 싫어했기에 정치적 부담감이 크다고 판단하여 제주도를 제외하고 계엄을 선포해 버린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계엄령 이후 '계엄사령부'가 유일한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수사 총책을 맡은 전두환이 더더욱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됐습니다.

전두환의 권력

전두환은 10.26 사건 다음날 사건 수사를 빙자하여 윤일균 중앙정보부 제1차장 겸 부장 직무대리, 오탁근 검찰총장, 손달용 치안본부장 등을 보안사로 불러들여 국가원수 시해 책임을 물어 당신들을 다 잡아들여야 하지만 자신에게 협조하면 체포하지 않겠다는 압박을 하면서 사실상 자신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에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헌병까지 장악한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불러들인 후 사실상 대통령인 양 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정승화 vs 전두환

1212 군사 반란은 정승화 vs전두환이라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정승화는 자신에게 까지 뇌물을 주려고 했던 전두환을 비판하면서 전두환을 밀어낼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하나 여기저기 전두환의 밀정이 있었고 정승화의 계획은 전두환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정승화보다 빨리 움직여서 정승화가 박정희 시해 사건 현장에 있던 것을 구실로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웁니다.

전두환은 10.26 사건 당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와 한 파였다고 주장하면서 정승화 총장을 체포할 구실을 만들었고, 하나회 조직원들과 함께 모여서 1주일 만에 12월 12일에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의하게 된 것입니다.

글을 마치며

이후 전두환은 전방을 지키던 군사력까지 끌어들여 정승화를 체포하였고 명목상 필요했던 참모총장을 체포하는데 필요한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제가를 받아냅니다. 이는 선체포 후동의 라는 명백한 불법 행위였습니다.

이후 정승화는 17단계 강등을 당했으며 당시 악명 높았던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이때 서빙고 분실로 끌려간 사람은 창태완, 정병주, 김진기 그리고 이건영, 문홍구 이렇게 다섯 사람입니다.

참모총장 정승화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7년형으로 감형되어 81년 전두환 취임기념 특사로 사면 복권 되었고 1988년 군적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는 2002년 당뇨와 고혈압 그리고 만년에는 파킨슨병을 앓고 2002년 6월 12일에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시대상 그리고 김재규의 이상한 선택 박정희를 죽이고 김재규의 기반이 있는 남산으로 안 가고 왜 육군본부로 김재규는 갔을까요? 이 선택에서 기회를 잘 포착해 대통령 자리까지 간 전두환 그 과정에서 참모총장 정승화의 알력 다툼

영화 우민호 감독의 남산의 부장들 그리고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 시간 흐름상 이여지기 때문에 남산의 부장들 보고 서울의 봄을 보신은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의봄-포스터
서울의 봄 포스터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